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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에게 하고픈 말이 있어
왜 그렇게 아픈 미소를 지어 보였니난 사랑을 믿을 수가 없지
왜 시간을 이기지 못하는가 물었어
난 세상이 거짓이라 했지
왜 하늘이 이토록 푸른지 물으며왜 인생이 슬프다고 하니
그건 별들이 사라지는 것을 알기에_언니네이발관, 꿈의 팝송
꿈의 팝송 展
2009/02/20 - 2009/02/28
제너럴닥터( http://generaldoctor.co.kr )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와우산길 98번지. 02_322_5961.전시기념공연 : 언젠가이발관 + 조이라이드 unplugged
2009/02/22 (일) 저녁 8시
누군가의 이름을 자유로이 부를 수 있는 오만함이 나에게 허용된다면, 나는 그의 사진을 사사진私寫眞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름을 그렇게 정의내리는 순간,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 이름은 문학의 사소설私小說 개념에서 출발한 것인가? 그는 셀프 포트레이트를 위주로 찍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가족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인가? 그마저 아니면 개인적인 사물에 어떤 향수를 담아 찍는 사람인가?
내가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단 하나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부러 사진이라는 단어 앞에 사私라는 말을 붙여가며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인가. 그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사私의 의미는 피사체의 영역이 아니다. 표현기법의 범주도 아니다. 나의 말에 누군가 다시 조소로 물을 것이다.
혹시 당신도 그의 사私를 파악하지 못한 것 아닌가?
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사진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 중에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의 사진이 소재 혹은 주제 혹은 기법의 문제가 아닌, <결>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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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메라를 들고, 피사체를 찾아 나선다. 장면을 발견하면, 셔터를 눌러 그것을 사진으로 만든다. 이때 대부분의 사진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장면>이지 결코 사진을 찍는 <나>가 아니다. 개인이라는 존재는 사진 속에서 은연중에 드러난다. 그것은 한 작가가 찍어온 많은 양의 사진을 한 번에 보았을 때, 스타일로, 태도로, 구도에 대한 인식으로, 예술관 혹은 가치관의 형태로 나타난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경우다.
그는 조금 다르다. 앞서 나는 분명 그의 사진을 사사진私寫眞이라 불렀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에 사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법이다. 불행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묻어나는. 그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무엇. 천성과도 같은 것이다. 사진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한 개인의 지독한 감정. 그 마음의 결을 고스란히 비추는 방식이 그의 사진이다.
다시 허나 다르게 말하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떠한 장면이 내 눈앞에 있는가>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집중하는 측면은 순전히 <이 장면을 바라보는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이다. 단서는 두 가지의 사진을 함께 볼 때 더욱 뚜렷해진다. 나는 꼬마아이의 가방을 담은 사진과 정방형의 꽃 사진을 함께 본다. 판형도 피사체도 현격하게 다르지만, 그 안에는 비슷한 질감으로 받아들여지는 슬픔이 있다. 더 개인적인 화법으로 말하자면 <대상이 불확실한 그리움>처럼 보인다. 피사체의 성격은 상이할지라도 사진 속에서 한 사람의 감정으로 귀결되는 선 혹은 결. 나는 그의 사진을 보면서 상상한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끌어내렸을까. 사진을 보는 것보다 떠올리는 그 행위가 더 소중하다. 사진을 통해 타인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불가능해 보여도 짐작해보는 것. 결과 결의 접점은 그때에만 생겨날 수 있다. 어떤 사진 앞에서든. 저것은 그의 작품이고 이것은 나의 눈이다, 라는 생각으로는 결코 접점을 만들 수 없다. 저것은 그의 감정이고 이것은 나의 감정이다, 혹시라도 나의 우울과 그의 우울에 닮은 구석이 있지 않을까-하는 앳된 의심만이 이 엿봄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
언젠가 그는 자신의 사진이 지닌 이미지에 대해 말해 달라 했고, 나는 즉석에서 이렇게 답했다.
편의점 앞에서 비도 안 오는데 둘이 쪼그려 앉아 맞담배를 피우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거예요.
“꼭 울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말을 끝낸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니, 이미 울고 있어요.
이미 울고 있는 것, 그의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울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울고 있는 그의 표정은 어떠한가>이다. 우리는 사진을 볼 때, 버릇처럼 웃음과 눈물을 구별하고 그 안에 감동과 의미를 주입한다. 그의 사진 앞에서 그러한 구분은 불필요하다. 그는 이미 울고 있으니. 그보다 우리에게는 그 울음의 표정, 눈물의 온기를 나 자신의 것과 맞추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감정의 결을 따라잡는 일. 눈물 흘리는 누군가 보았을 때,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는가, 다독여주는가, 화를 내주는가, 이해할 수 없다며 떠나는가,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사진에서 느껴지는 그의 사적인 감정이 나의 사사로운 마음과 닮아 보인다면,
같은 소리로 울어도 무방할 것이다.
_이로(수상한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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