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성호 개인전, 後日談, 20080310 - 20080330, 사진쟁이1019
사람들은, 자기가 상대방에게 싫증이 났기 때문에, 혹은 자기 의지로, 또 혹은 상대방의 의지로 헤어졌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계절이 바뀌듯, 만남의 시기가 끝나는 것이다. 그저 그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면, 마지막이 오는 그날까지 재미있게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뿐이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요시모토 바나나, 하드보일드 하드럭)
수줍고 낯가림이 심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커서도 역시 수줍고 낯가림이 많은 어른이 되었다. 존재감이 약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커서는 꼭 ‘괴짜’가 될 거라고 혼자 다짐하던 소년이 말이다.
어른이 된 소년은 친구가 많아진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만큼 많은 사람들이 멀어져간다. 싫증이 났거나 누군가의 의지로 헤어진 것이 아니다. 그저 만남의 시기가 끝났을 뿐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소년은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누군가가 떠나도 이야기는 남는다.
계절이 바뀌듯, 만남의 시기가 끝나서 이제는 더 볼 수 없는 사람들과 그리고 언젠가는 만남의 시기가 끝날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뿐이다.
* 필름도 배터리도 필요 없는 그의 카메라
유년시절, 그때는 다들 그랬겠지만, 비가 오면 놀이터에 나가서 물길을 내곤 하며 놀았다. 손으로 힘겹게 땅을 파서……, 물길을 개척하여 나만의 세계를 완성하려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주인집 녀석이 어디서 호미를 들고 나타났다. 조막만한 손으로 호미를 당해낼 재간은 없다. 세발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질주하면, 녀석은 보조바퀴 달린 네발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백 원짜리 플라스틱 칼을 허리에 차고 뿌듯해 할 찰나에 녀석은 오른손에 칼, 왼손에 방패를 드는 여유를 부리곤 했다. 녀석이 나타나면, 비속에서의 흙장난, 자전거 타기, 칼싸움도 갑자기 싫증이 나곤 했다. 어느새 난 기대에서부터 체념까지 빠르게 해치워 버리는 아이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몹쓸 주인집 녀석이 새로운 아이템을 들고 나타났다. 카메라였다.장난감 카메라……, 플라스틱 셔터를 누를 때마다 철컹, 철컹 스프링 튕기는 소리와 함께 설악산 단풍, 경주 불국사 석탑, 제주도 하루방, 서울 남산타워 등등 관광지의 진부한 풍경들이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필름도 배터리도 필요 없었던 카메라.삽시간에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 줄을 서고, 이윽고 내 차례다. 비좁은 파인더 안에 시선을 몰아넣고 조심스럽게 셔터를 누른다. 철컹, 철컹, 철컹. 조잡한 사진들은 이내 다 소진되고 다시 처음 사진이 돌아온다. “에이, 재미없어~”라고 미처 소리치기도 전에 내 뒤에 녀석이 나를 밀쳐낸다. 집에 돌아가서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는다. 어머니를 쳐다보는 아이의 눈에 설악산 단풍, 불국사 석탑, 제주도 하루방, 서울 남산타워가 어려 있다.
처음 그의 존재를 확인한 건, 암실 속에서 그의 서툰 손동작들이 빗어낸 둔탁한 소리로부터였다. 더 이상 그가 작업하는 암실에선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더 이상 그는 술자리에서 철지난 파인애플 통조림 얘기는 안 한다.술자리에서 달큰히 취해서는 중경상림 얘기를 몇 번쯤 했을까? 그 중경상림을 열 번도 넘게 봤다는 얘기는 몇 번쯤 했을까?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않겠노라……, 이번이 은퇴 공연이라는 말을 몇 번쯤 했을까? 사진을 그만 찍겠다던 얘기는 몇 번쯤 했을까?
「그렇게 많은 인용문들과 음악들을 기억하며 사는 거 피곤하지 않아?」대답이 없다.
비가 오면 수업을 재끼고, 교정을 거닐며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 그립다. 나에게만 들리던 그 노래. 입 안에서 웅얼거리던 노래가 조용히 입 밖으로 새어나와 나의 귀까지만 도달하던 그 노래들. 눈 앞의 풍광들이 가끔 어지러울 때면 그렇게 노래는 나를 세상 밖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는 비교적 긴 시간 속에서 사진을 찍고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했다. 바트 속에서 흐물거리는 무언가가 떠오를 때, 바트 안에 시선을 몰아넣던 그의 눈에 무엇이 어렸는지 나는 모른다. 그가 무엇을 만났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바트를 흔들며 기다린 것이 관계없음. 부재함. 거리감. 이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 우리는 그가 만났던 것을 보려 한다. 무엇을 보든 그건 그의 의도와는 관계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를 책망하지는 말자. 사실 그는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아무 의도 없이 그의 사진을 바라본다. 나는 내가 의도하지 않을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불러대던 노래는 의도한 바와는 관계없이 나를 세상 밖으로 데려다 주곤 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바트 속에서 인화지를 건져낼 때 그가 얼마만큼의 속도로 어디로 향해 갔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건, 더 빠른 속도로 그는 오래된 약품들이 내쉰 깊은 한숨 가득한 암실 속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가 아직 카메라를 놓지 않는 걸 보면 바트 속에서 떠오른 것들은 그를 더할 나위 없이 그윽한 곳으로 데려다 주었나 보다. 그의 카메라가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이따금씩 그는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푸념하곤 한다. 예전처럼 밴드를 하겠노라. 클래식 기타를 잡겠노라. 그러나 사진에 자신의 존재 의미를 내맡긴 그가 그럴 수 없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수없이 그런 푸념을 늘어놓을 때마다 그는 자신이 사진을 놓아 버리는 거라 믿을지도 모르겠으나, 실은 그의 사진이 그를 놓아 버리려는 건지도……, 그럴 때마다 그는 사진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바트 속에 덱톨을 머금은 인화지를 바라보겠지. 그의 눈에 관계없음. 부재함. 거리감. 이 어린다. 철컹 철컹 스프링 튕기는 소리와 함께 조잡한 그의 내면이 등장한다. 괜찮다. 우리의 내면은 모두 초라하니까. 그래도 그의 파인더 안은 시시하지 않으니까. 파인더 속 그의 내면은 아직 소진되지 않았으니까. 필름도 배터리도 필요 없는 그의 카메라는 마르지 않는 그의 내면을 모조리 닮아내며 멈추지 않을 게다. 그가 목말라 쓰러질 때 까지. 필름도 배터리도 필요 없는 카메라의 스프링이 탄성한계를 넘을 때까지. 그의 입 안에서 웅얼거려진 노래가 아직도 그의 귓가를 맴돈다.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자. 오늘은 집에 가서 나의 야시카 스트랩 자락을 붙들고 그의 노래를 들려주리라.
(글/문병주)
수염 난 초등학생은 후각이 예민하다
평범하지 않음 속의 평범함, 평범함 속의 평범하지 않음
이쁘신 신동씨
해 낮은 창 너머로 아이들이 웃는다. 현아의 리코더도 웃는다
지쳐 앉아 쉬다
夢想家(a), 夢想家(b)를 만나다
선생님, 그 카메라는 또 뭐예요?
새로운 것을 계속 덮어가고 지나간 것들을 조금씩 밀어낸다
댓글